[정책[시각장애인도 물리치료사가 될 수 있다 "독일처럼"
페이지 정보
작성일 24-12-03 10:39본문
2024년 11월 어느 오후, 며칠간 유난히 어두웠던 하늘이 드디어 햇살을 가득 쏟아내던 오후, 필자는 한국의 어느 연수팀과 함께 독일 마인츠에 소재한 물리치료소 Physio Vital을 방문했다. 이곳 운영자인 쉘러호프(Ulrike Schellerhoff)씨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당당하고 활기 넘치는 목소리와 태도가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반갑습니다! 5분 후에 예약 환자가 도착하니 그전에 물리치료소를 빨리 소개해 드릴게요. 자, 저를 따라오세요!"
이곳에서 직접 물리치료사로도 활동 중인 쉘러호프씨는 1층과 2층에 있는 치료실과 대기실 등 8개가 넘는 다채로운 공간을 보여주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그의 발걸음 또한 당당하고 사뿐했다. 그는 각 공간의 인테리어와 기구, 장비 구성을 직접 담당했다고 설명했다.
쉘러호프씨는 약 1 센티미터 두께의 특수 렌즈(렌즈 중심부에 또 다른 초점 렌즈가 결합된 형태이다)가 부착된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시각장애인이다. 시각장애인이 직접 운영하고 물리치료를 제공하는 기관이라고 해서 우리가 여기를 방문한 것이다. 두꺼운 안경을 보아하니 그는 교정시력으로 사물 인식이 가능한 경증시각장애인인 듯했다. 하지만 우리는 깜빡 '속았다'.
쉘러호프씨가 직접 운영하고 물리치료를 제공하는 Physio Vital 홈페이지. ⓒPhysio Vital Mainz
정확히 5분 뒤 예약 환자가 도착했다. 환자는 7년 전 심근경색 후유증으로 하반신 운동 제약이 많아 지금까지 꾸준히 물리치료를 받는 80대 여성이었다. 마치 모녀지간 같은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쉘러호프씨가 말했다.
"자, 벽기둥에 발을 걸치고 평소 하시던 동작을 연습하세요. 먼저 오른발... 이제 왼발... 이제 복도를 걸어보세요... 천천히 걸으세요…이제 돌아와서 다시 벽기둥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보세요…"
특이하게도, 물리치료사는 쉬지 않고 말을 했다. 아니, 대화를 일부러 유도하는 것 같았다. 물리치료사와 환자 사이의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환자의 일상 속 소소한 이야기까지도 대화 주제가 되어 두 사람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다소 시끌벅적한 물리치료가 이어졌다.
또한 특이하게도, 물리치료사와 환자 간의 신체 접촉이 많았다. 치료 차원의 신체 접촉이라기 보다는 물리치료사가 환자를 느끼기 위한 신체 접촉 같았다. 가령 환자가 보행보조기를 잡고 복도를 걸을 때 물리치료사는 환자 뒤에 서서 두 손으로 환자의 골반을 지지하며 골반을 느끼는 듯했다. 환자가 다리 운동을 할 때 물리치료사는 환자의 관절을 수시로 만지면서 관절을 느끼는 듯했다.
"치료사님은 전맹인이세요."
한국 연수팀에게 물리치료소를 주선하고 동시에 쉘러호프씨를 물리치료사로 양성하는데 일조한 플로그하우스(Nadja Ploghaus)씨가 우리에게 속삭였을 때 우리 모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치료사님은 환자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환자 호흡과 음성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여 환자 상태를 파악하고 계세요. 환자와 신체 접촉을 하면서 환자가 땀을 흘리는지, 체온 변화가 있는지, 관절 움직임은 어떠한 지 등을 파악하고 계세요. 시각이 아닌 청각과 촉각을 최대한 활용하여 환자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적합한 물리치료를 실시하는 중이죠."
플로그하우스씨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에이… 설마요. 그래도 조금은 볼 수 있으시겠죠. 아까 저희와 악수도 정확히 주고받았는데요? 계단을 오르내릴 때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요?"
이러한 반응에 매우 익숙하다는 듯 플로그하우스씨는 미소를 지으며 짧게 답했다.
"오랜 세월 충분히 훈련하고 연습한 결과입니다."
마인츠 직업진흥원 홈페이지 화면. ⓒBFW Mainz
독일에는 시각장애인 전문 직업교육기관이 총 8군데 있다. 이 중 청소년 및 청년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교육원(Berufsbildungswerk)이 3군데, 성인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진흥원(Berufsförderungswerk)이 5군데이다.
시각장애인 대상 교육 직종은 안마·물리치료·피부관리·금속·목공·원예·IT·영업·판매·사무·행정 분야 등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교육과정은 2~3년 걸리는데, 독일 직업교육 특성상 이론교육보다는 실무교육 및 현장직업훈련 비중이 훨씬 높다. 직업교육원과 직업진흥원은 직업학교와 직업훈련시설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어서, 교육생은 가령 일주일에 2일은 직업학교에서 이론수업을 듣고 3일은 직업훈련시설에서 실무교육 및 실전훈련을 받는다. 교육과정 중 다양한 기업실습도 진행되는데 기업실습이 실제 취업으로 연결되는 확률이 매우 높은 편이다.
주목할 점은, 시각장애인은 정안인과 동일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정안인과 동일한 국가시험(졸업시험)을 치르며 정안인과 동일한 자격증을 취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 공인 물리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한 시각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동등한 지위와 근로 조건 속에서 물리치료사로 활동하게 된다.
필자와 한국 연수팀은 Physio Vital 물리치료소 방문 전 마인츠 직업진흥원(BFW Mainz)을 견학했는데, 마인츠 직업진흥원은 성인 시각장애인 대상 안마사· 물리치료사 양성 기관으로 유명하다. 이곳 운영관리자인 플로그하우스씨의 설명에 따르면 안마사·물리치료사 교육과정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100퍼센트라고 한다.
참고로 독일에서 물리치료사는 주로 대학에서 양성된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은 대학진학을 위한 인문계 중등학교보다는 취업을 위한 실업계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경우가 많고, 대학은 시각장애인의 특별 요구와 특성에 부합하는 교수법이나 기반시설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시각장애인은 시각장애인 전문 직업교육원이나 직업진흥원에서 물리치료사로 양성되고 있다. 한마디로 독일은 물리치료사 양성에 있어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별 기관을 운영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마인츠 직업진흥원 경우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정안인도 함께 물리치료사로 양성되는 통합형 교육과정을 제공한다.
플그하우스씨는 마인츠 직업진흥원이 내년이면 설립 60주년이 된다고 덧붙이며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독일에는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시각장애인은 물리치료사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게다가 시각장애인이 성인이 아닌 유소아나 아동을 대상으로 물리치료를 제공하는 것은 더더욱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저희 기관은 시각장애인도 충분히 물리치료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시각장애인 직업교육과 관련해 독일보다 앞섰던 프랑스 모델을 적극 참고하여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주정부 지원을 받아 시범사업 형태로 시각장애인 물리치료사 양성 과정을 도입했는데,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플로그하우스씨는 말을 이어 나갔다.
"돌이켜보면 시각장애인도 물리치료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길을 개척한 어느 의사와 직업훈련트레이너의 도전이 있었기에 저희가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물리치료사 양성과정을 운영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아이디어와 의욕 넘치는 몇몇 사람의 용기와 투지가 있었기에 오늘날 독일에는 시각장애인도 물리치료사로 일할 수 있습니다. 한국도 독일처럼 충분히 가능합니다."
마인츠 직업진흥원 홈페이지의 물리치료사 양성 코스 관련 내용. ⓒBFW Mainz
쉘러호프씨와 작별 인사를 하고 물리치료소를 나오는데 오후 햇살이 아까 보다 더욱 눈부시다. 그리고 플로그하우스씨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돈다.
"아이디어와 의욕 넘치는 몇몇 사람의 용기와 투지가 있었기에 오늘날 독일에는 시각장애인도 물리치료사로 일할 수 있습니다. 한국도 독일처럼 충분히 가능합니다!"
눈부신 햇살이 희망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출처 : 에이블뉴스(https://www.ablenews.co.kr)